작품사진/다시 뜨는 백제

[스크랩] 금동대향로에 대하여...

싼타마을 2006. 4. 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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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이며 백제금동대향로는 높이 61.8cm, 몸통 최대지름 19cm, 무게 11.85kg으로 규모면에서 다른 박산향로와 비교할 수 없는 대작이다. 향로는 뚜껑과 몸체, 다리로 각각 따로 구리합금으로 주조되어 하나로 만들어 금으로 도금되었다.

 

뚜껑은 정상부에 봉황이 턱밑에 여의주(如意珠)를 끼고 있고, 그 아래로 다섯 악사와 봉황, 인면조신상, 인면수신상 등 상상의 동물과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코끼리?멧돼지?사슴 등 모두 42마리의 짐승과 5인의 악사를 비롯한 17명의 인물이 74곳의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이 밖에도 6종류의 식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낙하하는 폭포 등이 보이고 있다.

 

한편 뚜껑에 뚫린 연기구멍은 봉황의 가슴 윗부분에 연기가 나올 수 있도록 뚫은 2개의 작은 구멍과 함께 다섯 마리의 새가 앉은 산봉우리 뒤쪽에 5개, 다섯 악사 앞에 솟은 산봉우리 뒤쪽에 5개를 둥글게 돌아가며 배치하였는데, 봉황의 가슴에 뚫린 2개를 제외하고는 솟아오른 뒤편에 가려져 정면에서는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연꽃잎은 그 끝이 살짝 반전되었으며 잎의 끝부분을 사선문으로 음각하여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훨씬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층을 이룬 연꽃잎은 몸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단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데 제일 하단의 연꽃잎에는 2줄의 음각선을 복엽으로 묘사하였다. 윗단과 그 아랫단 연꽃잎 외면과 윗단의 연꽃잎 사이의 여백에는 27마리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1993년 12월 12일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백제 나성<羅城>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 논바닥 제3건물지 중앙칸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출토된 이 향로는 금동광배편 등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수습되었다.


3단의 외반<外反>된 연꽃잎들로 장식된 몸체는 마치 활짝 피어난 한송이의 연꽃을 연상케하며 받침대는 이 연꽃송이의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몸체의 각 연잎 표면에는 가릉빈가(불사조<不死鳥>)와 물고기, 기타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하나씩 양각되어 있고, 뚜껑에 배치된 23개의 산들은 4∼5단으로 첩첩산중을 이루어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 비파, 현금, 북을 연주하고 있는 진악인물상<秦樂人物像>을 비롯하여 택견무인상과 기마무인상<騎馬武人像>, 기마수렵상(騎馬狩獵像), 코끼리를 탄 인물, 책을 보는 인물, 그리고 산양<山羊>과 호랑이, 새, 원숭이, 멧돼지 등 현세의 동물과 신수<神獸>, 서조<瑞鳥>, 폭포, 나무, 불꽃무늬 등 약 100여가지의 문양들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는 뚜껑 꼭대기에 별도로 부착된 봉황은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서 날개를 활짝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봉황의 앞가슴과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상들 앞뒤에는 5개씩의 구멍이 뚫려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몸체에서 피어난 향연<香煙>이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이적인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 향로는 중국 한대<漢代>에 유행한 박산로<博山爐>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는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세부표현에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이 향로는 제조기법 또한 뛰어나며,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인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케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라 하겠다.

 

출토지


[능산리 고분]


부여 능산리 절터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되었으며 백제시대 절터로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과 능산리고분군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내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배치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목탑은 금당과 함께 이중기단위에 세워졌으며, 목탑터에서는 사리감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는 모두 20자의 글씨가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건물터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금당은 이중기단을 갖춘 팔작지붕으로 추정되며, 전면 5칸, 측면 3칸이다. 계단은 남북의 두 곳에만 설치하였다. 강당은 길이가 37cm나 되는 거대한 집으로 내부는 2개의 큰 방으로 나누어지며, 서쪽 방에는 온돌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 형태가 만주 집안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동대자 유적과 비슷하다. 이 절터에는 공방 시설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는데 제 3, 4건물터이다.

이곳은 금속류, 칠기제품, 유리제품 등을 만들던 곳이다.
  [사리감 발굴사진]

특히 제3건물터의 중앙방의 장방형 목곽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사리감의 명문 내용으로 보아 이 절은 백제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 또는 능사로서 A.D. 56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백제 멸망과 함께 폐허화된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금동대향로 발굴사진]

 


[사리감 사진]




  1. 백제 대향로의 발견

백제 대향로의 발견은 기적에 비유된다. 1300년 동안 땅 속에 묻혀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견 이듬해의 4월 국립 중앙박물관에서는 한가지 유물, 백제 대향로만으로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12일 동안의 관람객만 6만 8천 여명. 백제 대향로 안의 수 많은 장식들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서 백제인의 생활상과 그들의 정신을 담고 있다. 백제 대향로가 말해주는 백제인의 실생활과 향로 안의 산과 계곡, 상상의 동물들과 신선이 말해주는 그들의 이상향은 어떤 모습일까.


2. 백제 대향로 제작방법

1993년에 출토된 백제 대향로는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석이 끝나지 않았다. 그 만큼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의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스페셜 제작팀이 박물관의 특별허가를 얻어 미공개 자료를 최초로 입수할 수 있었다. 먼저 최초로 공개되는 X선 분석사진을 통해 향로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추정할 수 있었다.


3. 향로의 주인은 누구인가?

백제 대향로의 주인을 밝히는 것은 향로에 담긴 역사를 풀어내는 실마리이다. 향로의 주인을 밝혀낼 단서는 백마강 북쪽 왕흥사 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왕흥사는 부여에 도읍을 정한 사비시대 백제왕실의 사찰이다. 왕릉과 절, 절과 향로의 관계는 향로의 주인과 용도를 분명히 증언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향로가 사비시대에 제왕이 사용하던 귀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4.
누가, 왜, 왕의 향로를 묻었나?

향로는 물 웅덩이에서 출토되었다. 때문에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어 진공상태를 유지하게 되어 부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웅덩이 안 쪽에 나무 판자로 벽을 잇대어서 만든 흔적과 그 위에 일정한 간격으로 포개진 기와가 드러났는데, 향로의 파손을 막을 수 있는 장치로 보인다. 비록 응급 조치지만 이런 인위적인 장치들 때문에 향로는 1300년 동안 완벽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왕의 향로를 이런 곳에 보관해야만 했던 상황이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5. 백제시대 음악의 재현

백제 대향로의 윗부분에는 다섯 사람의 악사가 생생한 표정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그 주변에 다섯 마리의 새가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의 그림이 있다. 역사스페셜은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백제시대의 악기를 토대로 한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이 실험은 1300년 전의 백제인의 삶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는 시도이다.

 

출처 : 디지털사랑방
글쓴이 : 루돌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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